그제까지 나는 사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와 실제로 말을 주고 받은 것은 한 번 뿐이고, 그가 2개월 간 출장에서 나라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protocol 이슈들에 담담히 대처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메일들의 참조인으로만 느끼고 있었다.
내가 1층 출장자 lab 에 내려가 SIM카드 커터를 빌리려 할때, 바쁜 와중에도 손수 처리해서 주는 모습에 참 자상한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가 2학년,5살 두 아이의 아빠라는 점이나 나보다 2살이 많다는 것, 그리고 이제 3일 후면 귀국을 앞두고 있었다는 점은 사고가 난 다음에 알게 되었다.
부서장과 동료들은 금요일 밤 새벽 늦게 일하고 있는 나에게는 연락하지 않고, 이 뉴저지에서 제일 크다는 병원에서 분주히 사태를 수습하고 있었다고한다. 내가 토요일 오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2가지 뇌사판정 시험을 마친 상태였고, 남은 동료들은 뇌사 판정 시 보호자 동의 없이 호흡기를 뗀다는 뉴저지 법을 듣고, 백방으로 연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아내는 30시간 후 도착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달라스에서 급히 온 총무 부장은 회사의 선임 변호사와 연락하고, 나는 율이 친구 아빠가 이 병원 암센터에서 근무하는 줄은 모른 채, 도움을 주실 내가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 의사선생님이라 주말에 연락하게 되었다.
사고가 났을 당시,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상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사실이 유일한 위로가 되는 점이라면 이 현실이 너무나 가혹하다. 그의 아내는 오늘 도착하였고, 남편이 호흡기로 숨을 쉬고 있을 뿐,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술이 어려운 상태였다는 점, 지금 maximum 으로 3종류 약을 모두 투여하며 아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마지막 검사를 미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흐느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위해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뿐이다.
40일간 보아온 동료의 수첩에는 금일 해야할 업무가 적혀있고, 그의 자리에는 아직 가방과 소지품이 남아있다. 2시간 전, 호텔 방 번호와 체크아웃 이전에 소지품을 챙겨야 한다는 메일이 왔다.
이 현실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심난하고 만감이 교차되었다.
돌아가신 할머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생각나고 허전함이 몰려온다.
그리고 한국에 계신 장인,장모님과 부모님이 사무치게 그립다.
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자야겠다. -2011-08-01